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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

 

동백꽃, 유채꽃, 벚꽃 등이 만개하는 4월, 제주는 봄꽃내음 가득한 꽃섬이 된다. 70년 전 과거의 제주 풍경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제주 4·3, 그 해에도 어김없이 봄은 돌아왔으나 계절이 주는 온기는 겨우내 얼어붙은 땅을 녹일 뿐, 그 땅을 밟고 선 사람에게는 닿지 못했다.

 

이념의 불길이 집어삼킨 마을이 수도 없이 많았다. 아무 힘없는 민간인들이 아프게 스러져 갔다. 제주 전역에 걸쳐 일어난 참상은 7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많은 이들의 상흔으로 남아 끊임없이 고통을 상기시킨다. 현재까지 살아남아 사건을 기억하고 이에 대해 증언하시는 분들은 그 수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정신적 트라우마와 외상의 고통은 그림자처럼 늘 생존자들을 따라다녔고, 그분들은 여전히 하루하루를 견디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계신다. 가족과 남편, 자식을 잃은 유족들의 가슴에는 4월이면 어김없이 동백꽃 붉은 꽃처럼 짙은 그리움이 가득 핀다.

 

생존피해자분들이나 유가족들에게 있어 사건 현장은 모두 피하고 싶은 곳이었다. 세월이 덮여 옛 흔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고,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장소들 중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곳 또한 드물었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로 되돌아가 이루어지는 촬영은 지난날 겪었던 시간들과 마주하며 괴로운 기억을 호출하는 일이다.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의 주름진 눈가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뒷모습에 절절하게 묻어나는 그리움을 보았다. 엄마 잃은 갓 태어난 아기를 그저 안고만 있다 떠나보낸 형의 눈물은 채 마르지 못하고 흘렀다.

 

촬영기간 내내, 과거의 기억과 대면하는 과정이 많은 분들로 하여금 마음 놓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분들은 어느 무엇 하나 잊지 않았으므로, 해마다 피어나는 붉은 상처를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도 잊지 않기 바라며 그 자리에 함께 섰다. 개인의 고통과 아픔이 역사와 대치하는 현실이 사진을 통해 보다 생생히 기록되어지기를 바란다. 

 

 

겨울 한 가운데서 다시, 봄을 기다리며…

 

2018. 12   김은주

 

 

 

 

노근리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 사이에 국내에서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군부대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교 밑에서 양민 300여 명을 폭격과 기관총으로 사살한 사건이다. 사건 현장인 ‘쌍굴다리’는 큰 산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커다란 바위가 있는 산골 마을에 있다. 쌍굴 중 한쪽은 보행자와 차량이 아주 가끔 지나다니며, 다른 한쪽으로는 조용히 냇물이 흐른다. 다리의 벽면을 따라 곳곳에 표시된 흰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들은 모두 총탄과 폭격의 흔적들이다. 군데군데 총알이 아직 박혀 있는 곳도 보인다. 무수히 남은 자국들은 당시의 잔혹했던 참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쌍굴로 피신한 사람들은 72시간 동안 지속된 폭격과 날아오는 총탄에 핏물을 제외한 그 무엇도 마실 수 없었고, 새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잇달아 경험해야만 했다. 어떤 어머니는 어린 아들, 딸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자식들을 치마 속으로 감추고 그 자리를 지켰다. 울음소리 때문에 총격이 멈추지 않자 다른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을 막으려 제 손으로 우는 아이의 입을 막아 죽게 한 이도 있었다고 한다. 남자들은 옷을 벗고 맨몸에 흙칠을 해 야밤에 탈출을 시도해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여자와 아이들은 쌍굴에서 대부분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들었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37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참상에서 살아남았더라도 정신적인 트라우마와 외상의 고통은 67년 동안 끊임없이 생존자들을 따라다녔고, 그분들은 여전히 하루하루를 견디며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계신다. 7월 말 한여름 밤 이 곳 마을 사람들은 ‘떼제사’를 지낸다. 온가족이 몰살당해 그 제사마저도 지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피해자분들이나 유가족들에게 있어 사건 현장은 모두 피하고 싶은 곳이었다. 다시금 그 장소로 되돌아간 피해자분들은 말씀하신다. 자꾸 생각나서 머리가 아파, 거긴 가지 말자,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해서 힘들어, 이맘때면 몸이 더 아파…….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서의 촬영은 지난날 겪었던 시간들과 마주하며 괴로운 기억을 호출하는 일이다. 긴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분들은 어느 무엇도 잊지 않았음을 모두가 잊지 않기를 바라며 그 자리에 함께 섰다. 

 

2017    김은주

오월 어머니 

 

광주 ‘오월 어머니’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오월광장어머니’는 민주화 과정에서 보호 받아야 할 국가로부터 희생당한 어머니들이 모델이 되었습니다.

광주의 오월어머니들을 만나게 된 것은 광주민주화항쟁 31주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어머니들이 겪은 5. 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여전히 아물지 못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현재진행형이었습니다. 광주라는 도시의 곳곳이 역사적 배경이 되었고, 또한 그곳은 개인의 비극적인 恨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남편이나 자식이 희생된 곳이거나 직접 부상당한 장소에서 어머니들의 현재 모습을 담았습니다. 31년 동안 눈길도 주지 않던 장소로 모시고 간 것은 어머니들이 과거를 떠올리게 하면서 동시에 가슴 속에만 묻어왔던 아픈 기억과 마주서는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습니다.

오월광장어머니 사진작업은 '어머니'에 초점을 맞춘 광주민주화항쟁 작업의 연장선과도 같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1976년 3월 24일부터 1983년 중반까지 지속된 ‘추악한 전쟁’은 수많은 실종자를 낳았고 그 무차별성에 정치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어머니들이 <오월 광장 어머니회>를 조직했다고 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붉은 광장은 집단적 기억을 강화하는 투쟁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태어날 아이를 위해 준비한 기저귀는 아이에게 채워지지 못했고 지금은 노모의 목에 스카프로 묶여져 있습니다. 그분들은 실종된 자녀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죽은자’가 아니라 ‘실종자의 어머니’로 ‘영원히 아이를 품는’ 존재의 어머니로 남아 있길 원하고 있었습니다.

광주 오월어머니들과 아르헨티나 오월광장어머니들은 모두 같은 상처와 아픔을 지녔습니다.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갔음에도 어머니들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지속되는 슬픔이었습니다. 수많은 희생으로 만들어진 광주오월어머니와 아르헨티나 오월광장어머니들을 통해 역사에서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사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오월광장어머니

¿Dónde Están?어디에 있나? 

 

2014년 10월 2일 목요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월광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저 뒤편에는 화합의 상징이라는 분홍색으로 도배된 대통령궁이 보였다. 철조망으로 가로막히긴 했으나 오월광장과 마주 보고 있었다. 바닥에는 붉은 벽돌이 깔려져있었고 어머니들의 상징인 스카프가 곳곳에 그려져 있다. 여기저기 상처투성인 바닥만 보더라도 고난의 시간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3시가 가까워지자 몰려온 취재진들이나 관광객들이 술렁인다. 오월광장 어머니회의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깃발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이제 곧 오월의 어머니들이 나타날 시간이다. 오후 3시 30분. 오월광장어머니들은 기저귀천으로 만든 하얀 스카프를 매고 나타나셨다. 한눈에 보아도 걸음걸음이 불편해 보이는 그 분들의 연세는 이제 80세에서 100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오나 눈이오나 자식 잃은 슬픔을 버티며 침묵시위를 이어 오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1976-1983년 군사 정권 시대에 약 3만 명이 실종되거나 살해되었다. 할머니, 어머니들이 실종자로 알려진 자식, 손자를 찾기 위해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 세월도 장장 36년이다.

광주 오월 어머니들의 자식을 잃은 천척의 한을 지구 반대편인 이곳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타국의 언어지만 그 분들은 온 몸으로 붙잡힌 자, 실종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어디에 있나?’를 외치고 있었다. 이제는 빛이 바래고 바래 흐릿해진 사진을 가슴에 품은 채 그렇게 오월의 붉은 광장을 시간을 거슬러 가듯 돌고 있다. 빛바랜 사진과는 달리 여전히 또렷한 상처를 안고.

사망, 실종자들이 3만 명에 달하는 만큼 단체들은 각기 다른 목적에 따라 어머니회, 할머니회, 아버지회, 침묵에 항거하는 아들, 딸들의 모임(H.I.J.O.S.), Familiares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그 중 오월 광장에서 만난 이들과 함께 사진작업을 할 수 있었다. 오월광장을 비롯하여 기억의 강, 해군사관학교(ESMA), 그리고 실종자들이 사라진 장소 등 그들의 역사성이 깃들어 있는 곳이 사진의 배경이 되었고 인물들을 그 중심에 세웠다.

매주 광장 집회에 나오시던 어머니들 중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일을 자행했던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그런 것이냐고. 세상 어디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어머니들이 가슴에 품고 계시는 아들, 딸들의 사진이 시간에 의해 희미하게 사라져가듯 어머니들의 젊은 모습은 사라졌다. 다만 긴 시간을 감내해 온 어머니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마음에, 역사에, 붉은 광장에 서있는 아름드리나무에 남아있을 것이다.

  

 

2015. 1. 20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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